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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초의차(ip:59.5.74.169)
작성일 2023-06-23 09: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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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성(見性) - 마음을 보다 124.
견성(見性)을 하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생각을 그쳐야 한다.
어떻게 하면,
생각을 그칠 수 있는가.
생각은,
의식이 만든다.
의식의 작용이다.
생각과 의식은
하나이다.
의식이 있어야,
생각이 있다.
의식이 없으면,
생각도 없다.
의식이 잠들면,
생각은 일어나지 않는다.
의식이 깨어 있어도,
생각은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
의식이 깨어 있고,
생각이 그치면,
견성을 할 수가 있다.
바로,
의식은 깨어 있고,
생각은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수행이다.
않된다.
의식은 깨어 있어야 한다.
생각이 멈추면 된다.
생각을 그치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생각을 그치게 하는 것이,
수행이다.
생각을 그치는 것이,
지(止)이다.
의식이 본성을 보는 것이,
관(觀)이다.
수상행식이
모두 생각이다.
수상행식을
모두 그치게 하는 것이다.
모두 그치면,
색(色)은 저절로 사라진다.
오온이 모두 사라지면,
본성이 저절로 드러난다.
화두는,
생각을 그치는 방법이다.
화두 삼매에 들면,
수상행식이 모두 사라진다.
수상행식이 사라지면,
마지막으로 색(色)이 사라진다.
비로소 본성이 드러난다.
그러므로,
생각을 그치게 하는 일이 수행이다.
생각을 그치지 못하면,
영원히 견성을 할 수가 없다.
모든 것은,
생각을 그치는 일이다.
견성은,
처음도 마지막도
생각을 그치는 방법은,
참으로 많다.
모든 일이 다
생각을 그치게 할수 있다.
집중을 해서,
한 생각만 하면 된다.
다른 생각이
일체 일어나지 않게 하면 된다.
호흡에 집중을 해도 되고,
숫자를 새는 일에 집중을 해도 되고,
달을 보고 관해도 되고,
물을 보고 관해도 되고,
삼매경에 들어가면 된다.
삼매를 이루지 못하면,
아무것도 않된다.
하루에도
오만가지 생각이 일어난다.
이를,
번뇌라 하고,
망상이라 한다.
오직 한 생각,
한 생각이면 된다.
한 생각에 몰두하면,
삼매에 들 수가 있다.
삼매(三昧) 현전(現前)을
반드시 이루어야 한다.
삼매경(三昧境)에
들어야 한다.
어설픈 삼매는,
찰나 견성을 할 뿐이다.
찰나 견성을 해서는
얻는 것이 없다.
온전한 견성을 해야만,
혜안이 열리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반드시,
온전한 견성을 해야 한다.
혜안이 열리지 않으면,
견성을 한 것이 아니다.
견성을 하면
반드시 혜안이 열리고
깨달음을 얻게 된다.
견성을 하면,
법안이 열리고,
2023년 6월 22일.
고월 용운합장.
견성(見性) - 마음을 보다 123.
견성 – 성품(性稟)을 보다.
무엇이 견성인가.
마음의 본성을 본 것이다.
본성의 성품을 본 것이다.
본성의 성품은 어떠한가.
텅 비어 아무것도 없다.
무엇이 본 것인가.
의식(意識)이 본다.
의식은 무엇인가.
마음의 작용이다.
아무것도 없는데,
의식은 있는가.
의식은
마음의 작용으로,
마음의 본성과 함께한다.
본성과 작용은,
언제나 하나다.
어떻게 보는가.
의식이 깨어있기 때문이다.
항상 깨어있다.
의식이 잠이 들면,
본성을 볼 수가 없다.
의식이 깨어 있으면,
생각이 일어난다.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다.
생각이 일어나지 않고,
마음의 본성을 볼 수가 있다.
의식만 깨어 있으면,
마음의 본성과
의식만 남게 된다.
마음의 본성과,
깨어있는 의식만 남게 되면,
저절로
마음의 본성이 드러난다.
의식은,
저절로 마음의 본성을 보게 된다.
의식만 남게 되면,
마음의 본성이 보인다.
볼려고 애쓰지 않아도 보인다.
그냥 보인다.
찰나 견성을 하면,
본성이 보이지 않는다.
견성 상태가 오래 지속되어야,
보인다.
그냥 본다.
밝다. 어둡지 않다.
빛이 나는 것도 없다.
해, 달, 별도 없다.
텅 비어 있다.
아무 것도 없다.
어떤 형상도 없다.
나도 없다.
내 몸도 없다.
내 마음도 없다.
나라고 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무아(無我)라고 한다.
무아는 내가 없다는 것을,
보고 아는 것이다.
텅 비어 있기 때문에,
공(空)이라고 한다.
실체가 없다.
아무 소리도 없다.
고요하다.
적적하다.
무어라고 이름,
붙일 수 없다.
이름이 없다.
그해서,
마음이라고 이름 붙였다.
마음도 없다.
그냥 이름이다.
마음은
편의상 붙인 이름이다.
분명히 존재하지만,
본성과 작용도,
체(體)화 용(用)이라고도 한다.
본성을 체라 하고,
작용을 용이라고 한다.
이렇게 이름을 붙인 까닭은,
보지 못해서 모르는 사람들을,
알게 하기 위함이다.
이미,
보고 아는 사람에게는,
번거로운 일이다.
밥을 먹어서 배가 부른 사람에게는,
진수성찬이 부질없다.
물을 마셔서 갈증을 해결한 사람에게는,
물이 더 이상 필요가 없다.
본성을 작용이 보는 것이,
견성이다.
본성을 작용인 의식이
보는 것이 견성이다.
본성의 성품을,
의식이 보고 아는 것이
색깔도 없다.
밝기만 하다.
생멸도 없다.
시작도 끝도 없다.
나지도 죽지도 않는다.
본래 있는 것이다.
늘지도 줄지도 않는다.
아무 변화도 없다.
본성과
작용인 의식은 하나이다.
그래서,
자기의 본성을,
작용인 의식이 보는 것이다.
이것이,
깨달음이 아니다.
성불도 아니다.
지혜도 아니다.
마음의 성품을 본 것 뿐이다.
깨달음은,
견성한 이후에 생긴다.
견성을 해야만,
깨달음의 길로 들어 갈수가 있다.
견성을 하지 못하면,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
혜안이 열리고
이제 시작이다.
수행자는 먼저
견성부터 해야 한다.
평생을 눈먼 사람이 된다.
내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견성은
자기 자신을 본 것이다.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다.
2023년 6월 20일.
첨부파일 견성123 124.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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